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거문도 점령 사건 (문단 편집) === 고종의 인아거청 === 1884년 7월 7일, 러시아 제국과 조선이 직접 수교를 하고(조러 수호 조약), 동년 12월 4일 [[갑신정변]]을 청군이 진압하였다. 이에 청의 내정 간섭이 증가하자 조선 조정이 러시아와 힘을 합치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 소문의 진상은 알 수 없으나 어느 정도의 근거는 있었다. 당시 [[고종(대한제국)|고종]]은 인아거청([[引]][[俄]][[拒]][[淸]]), 즉 러시아를 끌어들여 청의 영향력을 줄이려 하였다.[* 미국, 영국과 조선의 수교는 청의 알선(조선책략)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일본과 러시아를 견제하고 싶은 청의 바람이 반영된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청의 영향력이 너무 강해지자 조선이 다른 국가와 연대하려 하니 당연히 미국과 영국으로서는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고종은 김용원(金鏞元)·권동수(權東壽) 등을 비밀리에 [[블라디보스토크]]에 파견해 러시아 관리와 약정을 맺었다. 그 내용은 [[김옥균]](金玉均)이 러시아 영토에 가면 압송해줄 것, 일본의 보상금 요구를 파기시켜줄 것, 조속히 조약을 비준하고 육로 통상을 체결할 것, 러시아 군함이 한국 연해를 보호해줄 것 등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러시아 정부는 보호 약속보다는 통상 조약 추인과 육로 통상, 안전에 관한 토론 용의 등에 대해서만 회답했다. 한편 해가 바뀌어 1885년, 갑신정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에 파견된 서상우(徐相雨)·[[묄렌도르프]]는 비밀리에 주일 러시아 공사 다비도프와 만나 러시아 훈련 교관의 초빙과 [[영흥]]만 조차에 관해 협의했다. 묄렌도르프는 귀국하여 비밀 교섭의 경위를 고종에게 보고하여 윤허받았고 이에 정부간 정식 협약을 체결하기 위해 주일 러시아 공사관의 스페이에르가 입국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외아문독판 [[김윤식(조선)|김윤식]](金允植)은 청의 총판상무(總辦常務) 진수당(陳樹棠)과 일본 대리 공사 곤도 신스케(近藤眞鋤)에게 밀약 사실을 알리는 한편, 스페이에르에게 현재 미국 교관의 초빙 교섭을 진행하고 있기에 러시아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음을 통고했다. 1885년 7월 묄렌도르프는 이런 행보가 들통나자 청의 압력에 의해 물러나게 되었다. 이렇게 조선과 러시아의 연대 가능성이 높아지자, 이를 확인한 영국은 좌시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런 러시아의 행보는 영국에게 조선을 통해 [[극동]] - [[태평양]]으로 진출하려는 행보로 여겨졌다.[* 정작 러시아는 일관되게 조선의 요구에 시큰둥했고, 조선 방면 [[부동항]]보다는 [[만주]]의 패권에 더 관심이 있었다. 부동항이야 만주를 장악하면 [[뤼순]]을 얻어서 해결할 수도 있고. 물론 떡을 준다는 데 싫다는 측이야 없으니 받아들인 거지만.] 깜짝 놀란 영국이 러시아 해군의 동태를 감시하고 유사시 러시아 [[함대]]의 남하를 막기 위한 일종의 중간 보급 기지 및 [[해안포]] 진지로서, 자기들이 명명하기로는 포트 해밀턴(Port Hamilton, 해밀턴 항), 바로 [[거문도]]를 골라 점령했다. 이 때가 1885년 음력 3월, 양력으로는 4월 27일, 조러 수호 조약 체결로부터 1년이 안 되는 시점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